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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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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Home > 과천소개 > 문화유산 > 경기도지정문화재  인쇄 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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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81호]
  • 효령대군영정
  • 소재지 : 과천시 자하동길 63
  • 지정일 : 1978.10.10
  • 효령대군(1396~1486)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서 이름은 보이고 자는 선숙, 효는 연강이며, 묘는 과천현 동적리(현 서초구 방배동)에 있다. 대군의 영정은 연주암내 효령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대군이 불교에 귀의하여 많은 불사와 역경사업을 주관한 중 연주암과 관악사를 중창한 이유인 듯 하다. 영정은 원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94년 효령각을 짓고 옮겨 봉안하고 있다.
  • 82㎝×110㎝의 액내에 71㎝×99㎝ 크기의 비단에 그린 영정은 머리에 익선관형태의 황색 관모를 쓰고 있으며, 홍의의 도포를 걸친 채 탑형의 용봉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정면관으로 그린 전신좌상이다. 가슴에는 관대를 착용했고, 오른손으로 잡은 홀의 고리가 발까지 흘러내림과 동시에 무릎사이에는 옷주름이 묘사되고 있다. 얼굴은 눈썹과 수염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고 반개한 눈은 하향하고 있다.
  • 홍의는 채색이 많이 바래 원래 천의 바탕이 보이고 있으나 어깨와 무릎 사이에서는 운문과 당초문을, 홍포 하단에는 여의두문과 용비늘 및 발톱3조가 이금으로 정성껏 처리된 점과 납작한 방형의 선반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신발처리 등으로 미루어 조선전기 초상화 양상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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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 온온사
  • 소재지 : 과천시 관악산길 58
  • 지정일 : 1980.06.02
  • [옛 관리들의 편안한 쉼터, 온온사]
  • 온온사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관아에 부속된 객사의 정당 건물이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객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 역할과 함께 궐패와 전패를 모셔 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를 행하는 곳이었다.
  • 과천의 객사는 인조27년(1649) 현감 여이홍이 객사 동헌을 건립하여 창건되고, 현종 7년(1666년) 남창조에 의해 객사 서헌이 건립되어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규모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이 남행할 때에는 과천을 경유해야 했고, 경우에 따라 왕이 묵어 가야 했으므로 규모가 컸던 것이다.
  •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원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현륭원으로 고치고 이곳에 참배하기 위해 능행(1790.2.11)할 때 과천의 객사에 머물며 주위경관이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때 관아동헌에는 옛 별호인 부림을 따서 부림헌(富林軒)이란 현판도 하사하였다.
  • 일제 강점기에 온온사는 일인들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과천면의 청사로 사용하다 1932년 기존 건물을 헐고 원형을 변형하여 새로 짓고 사용되다가 1986.12.12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 객사의 형태를 참고로 하여 완전 해체 복원하였기 때문에 원형을 찾는 데는 새로운 조사가 필요하다. 객사의 일반적인 형태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을 두었으며, 앞면에 중문, 외문 그리고 옆면에 무랑 등이 설치되는 것이고 전패와 궐패를 모시는 정당에는 기와나 돌을 깔았고, 익실에는 온돌을 놓아 숙박이 가능토록 하였다.
  • 현재의 온온사 건물은 석축 위에 정당 3칸, 좌우익실 3칸을 둔 정면 9칸, 측면 2칸의 구조로 팔작지붕집에 정당 부분에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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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4호]
  • 연주암 3층 석탑
  • 소재지 : 과천시 자하동길 63
  • 지정일 : 1981.07.16
  • 연주암 3층 석탑은 고려중기 석탑 양식을 계승하여 조선 초기에 효령대군의 발원에 의해 5층석탑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 석탑은 대웅전 앞에 3.6m 높이의 3층석탑으로 주변에 석조 난간을 둘러 보전되고 있다.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는 각 판석을 서로 맞물리도록 구성하여 우주처럼 표현하였다. 기단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지대석 상면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2단으로 이루어진 상대갑석 위에는 3단의 층급 받침으로 1층의 탑신석을 받쳤다. 그 위에는 전체가 한돌로 구성된 1층탑신석이 놓여 있는데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한돌로 이루어진 옥개석은 하면에 4단의 옥개받침을 조각하였고, 두터운 전각 끝단은 약간의 반정을 이루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가파르게 처리되었다.
  • 2층 탑신부터는 그 높이와 크기가 갑자기 줄어 들었고, 옥개석 받침도 3단으로만 조각되었고, 2층 탑신에 비해 옥개석 규모가 그다지 줄지 않아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2층과 3층의 탑신석에도 우주만을 간략하게 모각하고 있다. 3층 옥개석 위에 올려진 상륜부는 현재 로반, 영화, 보개만 남아 있다.
  • 석탑은 지대석 위에 보이는 연판문이나 한돌로 구성되어 우주가 모각된 탑신석과 4단 내지 3단으로 구성된 옥개받침 등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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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62호]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소재지 : 과천시 교육원로 41 보광사 내
  • 지정일 : 1996.12.26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은 보광사 극락보전 중앙에 주불로 모셔져 있다. 이 좌상은 원래 양평 용문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6.25 당시 어떤 보살이 여주로 옮겨 모시고 있다가 1991년경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 전체적으로 볼륨감과 안정감이 감도는 이 불상은, 고개를 약간 수그린채 우수로 항마촉지인을 짓고서 결과부좌한 자세로 연화자 위에 앉아 있다. 나발의 낮은 육계 위에 정상계주없이 머리 중간에 큼직한 반달장주만 있으며, 양볼에 환미감(丸味感)이 남아있는 얼굴은 반개한 눈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작은 입, 늘어진 큰귀등에서 부처의 자비로운 모습을 느낄수 있다.
  • 삼도가 뚜렷한 목은 18세기 이후의 불상들처럼 어깨에 움츠리듯 붙어 있지 않으며 어깨와 가슴은 당당하고 건장한 느낌을 준다. 양 무릎의 폭과 높이도 전체 상의 비례와 시각적으로 알맞은 편이다. 이 같은 신체에 걸친 불의(佛依)는 어깨부분에 한번 접혀져서 오른쪽 어깨를 덮고 팔꿈치부분 뒤로 흘러내리고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온 자락은 가슴부분에 앙련(仰蓮)형태로 표현된 군의(裙衣) 매듭 아래인 배부분에서 v자형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 이 불상은 17세기말부터 18세기에 유행했던 대량제작으로 인해 경직되고 생략적인 상들보다는 조선초·중기의 불상양식을 고수하고 있는 상이다. 즉 환미감이 남아있는 상호, 움츠리지 않고 서 있는 목, 오른쪽 어깨에 자연스레 물결치듯 접히면서 가장자리가 살짝 반전되어 불규칙한 곡선을 이루는 점, 가슴부분에 묶여진 군의의 끝부분을 앙연형태로 표현한 점, 그리고 무릎 사이에 입체적으로 형성된 여러개의 주름 등에서 비교적 덜 도식화된 느낌을 받는다. 이 같은 예는 17세기 전기에 제작된 무량사 소조 삼존불중아미타불(無量寺 塑造三尊佛中阿彌陀佛)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보광사 목조여래좌상(普光寺 木造如來坐像)은 늦어도 17세기 중엽경에는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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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44호]
  • 추사 김정희 서신(3종 23통)
  • 소재지 : 과천시 추사로 78 추사박물관 내
  • 지정일 : 2010.09.08
  • 일제시대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1912~2006)가 과천시에 기증한 자료의 하나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편지이다. 추사 선생의 두 동생(김명희와 김상희)에게 보낸 13통, 역관 제자인 이상적에게 보낸 4통, 권돈인과 민태호에게 보낸 편지 6통이다.
  • 40대 전반에 두 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주로 가족과 관련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부모님의 건강 등이 자세하며, 다산 정약용과 그의 아들 유산 정학연에 관한 언급들도 보인다. 추사 선생의 개인사와 가족사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그리고 권돈인과 민태호에게 보낸 편지는 과천시절 추사가 교류한 사람들과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학연과 관련하여 당시의 학술경향을 언급하고 있어서 추사가 노년에도 변함없이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서신의 일부는 추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어 언제든지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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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20호]
  • 연주대
  • 소재지 : 과천시 자하동길 62
  • 지정일 : 1973.07.10
  • [하늘 향해 치솟은 절경 속의 작은 절, 연주대]
  • 연주대는 관악산정 연주봉의 죽순처럼 솟아있는 바위틈에 30m의 축대를 쌓고 나한전(응진전:應眞殿)을 지은 곳을 말한다.
  • 관악산 연주암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7년(677)의 상조사가 한강 남쪽에 유화(遊化)하다가 관악산의 명미 수려함을 수하여 산정에 의상대를 창건하는 동시에 관악사(冠岳寺)를 개산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의상대(義湘臺)가 연주대로 바뀐 데 대하여 고려가 멸망하자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오빠 강득용(康得龍:묘가 과천시청 뒤에 있음)이 서견,남을진 등과 같이 두문동 72인의 행적을 본따 불사이조(不思二朝)의 뜻을 품고, 관악산의 상대에 올라 송경(개성)을 향해 통곡을 하며 전조(고려)를 연모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16나한에게 기도하고 효험을 얻는다고 하여 기도사찰이라고 하는 응진전에는 철종때 김완송스님이 16나한을 봉안하여 나한전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법당내에는 근세작으로 보이는 석가 3존상이 모셔져 있고 2폭의 나한 탱화에 각각 여덟분의 나한을 그렸는데 색감이 화사하고 사실적이다.
  • 응진전입구에는 우진각지붕 형식의 마애감실에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법약을 준다는 약사여래가 입상으로 봉안되어 있는데 왼손에 약병을 들고, 오른손에 시무외(施 無畏)의 인(印)을 들고 있다.
  •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나한전법당 중수기에 의하면 효령대군이 조성)로 추정하고 감실의 조각수법 등으로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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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190호]
  • 과천관악사지
  • 소재지 : 과천시 중앙동 산 12-1
  • 지정일 : 2003.04.21
  • [효령대군의 얼이 서린 호국도량, 관악사지]
  • 관악사 창건에 관해 연주암지에 신라 문무왕 17년 의상조사가 의상대를 창건하는 동시에 관악사를 개산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조선 태종 11년(1411)양령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령대군에게 세자위를 전위한 후 관악산에 올라 전위에 따른 심정을 달랬다고 하는데 효령대군은 이곳에서 2년간 수양을 하며 관악사를 고지(古址자)로부터 현 위치로 이축하면서 40간의 가람을 건설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그러나 1999년 과천시가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에 의뢰하여 발굴조사를 한 결과 도자기편, 기와편 등 출토유물이 15세기전반부터 18세기까지 나오고 있어 이곳 관악사지는 효령대군이 이전 조성한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관악사지는 적어도 6개 이상의 건물이 있었으나, 이는 일시에 건립된 것이 아니고 시기에 따라 일정한 가람을 건립하고 이것이 수해에 의해 폐사되며 인근으로 옮기거나 혹은 그 자리에 대지를 조성하여 새로운 가람을 건립하여 명맥을 유지하다 18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찰건물은 급경사 지역에 석축을 쌓아 평탄하게 만든 후 평탄대지를 따라 누층적으로 축조하였는데 이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인공적인 건물과 자연지형과 조화를 꾀하려는 전통적인 산지 가람의 배치 방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 유일하게 소실된 것으로 조사된 연주대 바로 밑의 다지구 건물은 구국기도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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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기념물 제20호]
  • 과천 관악산 육봉일명사지
  • 소재지 : 과천시 중앙동 산 11
  • 지정일 : 2003.04.21
  • [불교미술의 일면, 관악산 육봉일명사지]
  • 정부과천청사 뒤로하여 관악산 제6 봉으로 오르는 도중 중간쯤에 폭포가 있고 이 폭포에서 오른쪽으로 약 50m정도 오르면 약 400여평의 대지에 정남향으로 자리한 곳이 일명사지이다.
  • 1999년 발굴조사 결과 복엽 8판연화문대석2점, 단엽 8판연화문대석 1점, 석탑재 등이 발견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암막새기와조각 20여 점이 혼재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 평기와는 숭문, 여 골문, 직선문, 격자문, 사격자문, 파도문, 기와 복합문,무문 등의 문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범어(인도어)가 표시된 숭문기와, 사설문기와, 및 무문의 소와(小瓦)는 통일신라로 구분된 것이기 때문에 일명사는 통일신라 하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인 18세기까지 존속되었던 사찰로 추정된다.
  • 이러한 사지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고된 적이 드문 고찰(古刹)로 비교적 원형을 잃지 않고 있어 수도권의 불교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문화적 가치가 높은 사지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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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31-2호]
  • 경기소리(나-긴잡가)
  • 보유자 : 임정자
  • 지정일 : 1999.10.18
  • 경기민요란 서울과 경기도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라 하겠으나, 여기서의 경기민요는 경기 긴잡가를 가리킨다.
  • 잡가는 가곡이나 가사와 같은 정가(正歌)의 반대격으로 속가(俗歌)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속가 중에서도 긴형식의 노래를 앉아서 부르는 것을 잡가라 하며 경기잡가 가운데 느린 장단으로 된 12잡가를 긴잡가라 부른다.
  • 경기 긴잡가는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 등 1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산가는 산천경치를 노래한 것이고, 소춘향가, 집장가, 십장가, 형장가는 판소리 춘향가의 내용을 따서 사설을 지은 것이며, 적벽가는 판소리 적벽가와 비슷하고 제비가는 판소리 흥보가와 내용이 통하지만 이들 잡가가 판소리 곡조로 된 것은 아니고 다만 일부 사설만 따왔을 뿐이다. 평양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는 서민적인 인정, 사랑 등을 노래하고 있다. 장단은 흔히 느린 6박 도드리장단이나 좀 느린 3박 세마치장단으로 된 경우가 많다. 선율은 서도소리제인 수심가토리와 경기소리제인 경토리가 뒤섞인 특이한 음조로 되어 있다.
  • 경기 긴잡가의 특징은 경기 특유의 율조로서 대개 서경적 혹은 서정적인 긴사설로 비교적 조용하고 은근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서정적인 표현이 많다. 조선시대 서울 장안의 소시민들의 모임장소인 ‘공청’ 또는 ‘깊은사랑’을 통해 12잡가가 발생하였으므로 공청소리문화의 특색을 잘 담고 있는 귀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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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44호]
  • 과천무동답교놀이
  • 보유자(개인) : 오은명
  • 지정일 : 2010.06.08.
  • 보유자(단체) : 과천무동답교놀이보존회
  • 지정일 : 2007.02.07.
  • 최소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답교놀이
  • 18세기 말 정조대왕은 선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비통히 여겨 경기도 화성의 묘소에 성묘하여 선친의 영을 위로하였다.
    능행이 빈번해지자 그의 효행을 찬양하기 위해 과천 백성들이 연희를 베풀어 임금을 기쁘게 하였다고 전승되어 온다.
  • 전체11차의 현릉원(顯陵園) 전배(展拜)의 기반이 되는 원행정례( 園行定禮 1790)에는 능행 거동길과 관련하여 사당리-남태령-과천현행궁-냉점점-인덕원천교 등을 6번 지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 과천의 무동답교놀이는 타 지역과 달리 정조의 능행의 큰 의미, 즉 효행을 기리기 위해 놀아졌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추앙해야 할 효행이 전통연희로서 과천지역의 굽이 전승 속에 살아 자존심을 북돋아 주었고 전승력을 강화시켜 올 수 있었다.
  •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우리사회 전체의 효와 민속예술을 재평가 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과천무동답교놀이에 대한 발굴복원 작업은 일제강점기에 중단된 것을 1981년 과천시 노인회장 이윤영등이 복원하여 과천무동답교놀이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다.
  • 풍물놀이, 선소리, 무동놀이가 결합된 전통연희로 인사굿→당고사→지신밟기→우물고사→마당놀이→무동놀이→지신밟기→다리고사→무동답교→뒷풀이 순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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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9호]
  • 과천 향교
  • 소재지 : 과천시 자하동길 18
  • 지정일 : 1975.02.05
  • [선비 정신이 살아있는 과천 향교]
  • 향교는 고려시대 이후 유학이념을 기본으로 교육을 가르치고 공자 등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방에 세운 일종의 학교로 전학후묘(前學後廟)배치를 이루며 양민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다.
  • 시(詩)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이 주요 교육내용으로 명륜당(明倫堂)에서 강론되었고 지금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東齋:양반 자제)와 서재(西齋:서얼과 평민자제)가 있었다.
  • 문묘(文廟:대성전)는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중국 5 성과 정호, 주희 등 공문 2철 그리고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 동방 18 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매년 봄(음 2월), 가을(음 8월) 초정일(初丁日)에 석전제(釋奠祭)를 그리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분향례(焚香禮)를 지낸다.
  • 과천 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본래의 위치는 과천 관아 동북2리에 있었으나 숙종 16년(1690)과천현감황이 명이 관아 서쪽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1959년 명칭이 시흥군이라는 군명에 따라 시흥향교로 사용되어오다 1996년 본래의 명칭인 과천 향교로 바뀌었다.
  • 지금의 향교 건물들은 1975년 9월중수하였는데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건물로서 맞배지붕에 풍판이 있고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었던 것을 좌우 양측에 한칸의 측실이 덧대어 있다.

향교 입구의 계단은 보통 3줄로 되어 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되, 계단을 오를 때는 오른쪽, 내려올 때는 왼쪽을 이용하는 것이 예의다. 중앙계단은 신(神)의 계단이므로 함부로 오르내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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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39호]
  • 문원리 3층 석탑
  • 소재지 : 과천시 교육원로 41
  • 지정일 : 1989.06.01
  • 문원리에 인접한 관문리의 일명사지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 단측기단과 3층탑신을 구비한 석탑으로 시멘트로 된 1단의 기단위에 놓았다. 지대석에는 각 면 2구씩 장방형액을 형성한 후 내부에 8괄호형의 안상(특수한 장식)을 1구씩 놓았다. 중대석은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4우(귀퉁이)에 우주를 모각하였고,1석으로 조성된 갑석을 올려 놓아 초층을 받치고 있다. 탑신과 옥개석은 각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3층탑신은 결실되었고, 2·3층 옥개석 역시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강하였다.
  • 보광사 경내에 소장되어 있으며, 기단부에 보이는 섬세한 안상형 장식과 초층탑신면, 옥개석의 알렵한 반전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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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77호]
  • 문원리 사지 석조보살 입상
  • 소재지 : 과천시 교육원로 41
  • 지정일 : 1983.09.19
  • 관문리사지 또는 문원 4리 산117번지에서 보광사 창건시에 3층석탑과 함께 옮겨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 높이 170㎝의 각석주에 전면만을 선각한 보살 입상으로 둥근 얼굴에 눈썹, 가는 눈, 입은 음각으로 낮은 입상으로 양각하였는데 전체적으로 평판적이다. 구분이 별로 없는 짧은 목에는 번뇌,업,고통을 상징하는 3도를 표현하고 양쪽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는 Y자형 옷깃을 표현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약식화 된 옷 주름을 보이고 있다. 왼손은 가슴에 대어 연꽃봉우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옷자락을 잡는 형태로 외장하고 있으며, 석주의 양측면과 후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는데 머리에는 후대에 얹은 것으로 보이는 지름 96㎝, 높이24㎝의 둥근 보개(갓)를 쓰고 있다.
  • 둔중해 보이는 이 보살상은 납작한 얼굴,좁은 어깨, 빈약한 체구, 서툰 옷주름선 등 지극히 도식화 되어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보여 주는 데 머리에 모자를 쓴 보살상은 대체로 고려초에 나타난 미륵불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지방화된 독특한 불상양식이다. 머리에 씌워진 보개는 고려초기4각에서 점차 8각으로 바뀌고 조선초기에는 원형의 모자형태로 바뀌고 있고 당초 제작 시에 얹은 것도 있고 후대에 얹은 경우도 있어 이 석조보살 입상은 고려초기에 민간에 의해 제작되고 조선초기에 보개를 얹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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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 문화체육과 윤미현 (02-3677-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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