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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Home > 옛날 옛적에 > 설화  인쇄 퍼가기

과천에는 많은 설화들이 있습니다. 함께 알아 볼까요? 설화 : 한 민족 사이에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관악산은 불산
관악산(冠岳山)은 태고 이래로 과천시(果川市)의 변천 모습을 묵묵히 지켜온 명산(名山)이다.
관악산(冠岳山)은 또 서울의 조산(朝山)이다. 내룡은 경상도 태백산맥으로 마이산(馬耳山)에서 갈라져 충청도 속리산으로 중조(中祖)가 되어 역으로 치달아 한강을 지계선(地界線)으로 과천 벌판에 우뚝 솟아 삼각산과 마주하고 있다.
그 형상이 마치 관(冠)처럼 뾰족하다 하여 관악(冠岳)이라 이름한 것이다.
관악산은 역사적으로 풍수지리학상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쳐다보기조차 꺼려했던 산이었다.
조선 초기에 왕궁터[宮基]를 정하는 데, 관악산을 정남(正南)으로 하면 궁성(宮城)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않다는 무학(無學)의 주장과 남면(南面)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鄭道傳)의 주장이 양립되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아무튼 관악산이 불산(火山)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과 삼성산의 불기(火氣)를 끊는다는 풍수설에서 서울 숭례문(崇禮門:현 남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 뿐만 아니라 모든 성문의 액명(額銘)이 가로로 되어 있음에 비하여 숭례문의 액명이 세로로 되어 있음도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기를 막는다는 뜻에서였다. 예(禮)는 오행(五行)으로 따져 화(火)에 해당하고, 오방(五方)으로 따져서는 남(南)에 해당한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숭례(崇禮)는 세로로 붙여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로 불산(火山)에서 옮겨 붙을 불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
대원군 집정시에 경복궁을 재건할 때 관악의 화기(火氣)를 극복하기 위하여 물짐승인 해태 조각상을 궁전에 안치했다고 하며, 또 관악산 꼭대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龍)을 그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했는가 하면, 관악의 주봉(主峰)인 연주봉(戀主峰)에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묻은 것도 그 때문이다.
풍수는 믿을 만한 게 못된다. 그렇지만 풍수를 믿음으로써 빚어진 구체적인 형상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실례로 서울 양반촌인 북촌(北村)에서는 이 관악산과 맞바로 보이는 집에서 자라난 딸과는 혼인을 거절한 실례가 있는가 하면, 주민들이 관악산과 마주 보이는 곳 을 피한다든지, 또는 친정으로 가 아이를 낳는 풍습까지 있었는데, 이는 불의 문화적 해석으로 열정적이고 반체적이기에 요망스럽고, 음탕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할 수 없다는 풍수의 숙명 때문이었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찬우물마을
조선 역대 제왕 중에서 효성이 지극한 22대 정조대왕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수원 현륭원(顯隆園)의 선친 묘를 참배하러 과천을 지나는 도중 이 마을에 이르렀을 때, 갈증이 심하게 났는데 신하가 이 근처 우물물을 떠 정조께 올리니 정조가 이 물을 마시고 난 후 물이 참으로 차고 맛이 좋다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정조는 이 우물에 가자당상(加資堂上:정3품 이상으로 품계를 올려 임금님이 직접 관리하게 한 곳)을 제수(除授)하였으며, 그 후로 이 우물은 가자(加資)우물로 불렸고, 물맛이 좋고 차다고 하여 찬우물이라고도 일컬었다.
또한 이 마을은 찬우물이 있다 하여 찬우물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내시마을 인덕원
인덕원(仁德院)은 조선조부터 내시들이 살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신체적으로는 비록 거세된 몸이지만, 환관(宦官)이라 하여 궁중의 임금과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신분이라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신분에 어울리게 남에게 자주 어진 덕을 베풀기도 하는 사람들이라 인덕이란 마을 이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마을에,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숙소인 원(院)을 두게 되어 이로부터 인덕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원은 임진왜란 전에 폐하여 없어졌다.
어쨌거나 인덕원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교통의 요지여서, 과천 · 안양 · 의왕 · 군포 · 성남 등 사통팔달한 오늘의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고 하겠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망령골
옛 과천군 상서면(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에 속하는 곳으로 과천의 갈현동 찬우물로 넘어가는 고개 주변에 망령골(亡靈谷)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초엽 어떤 젊은 사내가 나무를 팔러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를 지나게 되었는데, 웬 소복단장한 예쁜 여인이 나타나 교태를 부리며 그를 꾀었다고 한다. 젊은 사내는 넋이 빠진 채 여인에게 이끌려 가서 하룻밤의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는 별 탈없이 곱게 헤어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년 뒤였다. 망령골을 지나는데, 또 그 여인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관악산 모처의 바위 틈으로 가 보라"고 이르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사내는 여인이 일러준 곳으로 가 보았다. 놀랍게도 그 곳에는 갓난아이 하나가 울고 있지 않는가. 사내가 데려다 정성껏 기른 그 아이는 훗날 나라의 큰 재목이 되었다. 일설에는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망령이 나타났던 골짜기라고 하여 그 뒤부터 망령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관악산의 왕후묘
관악산(冠岳山)은 조선시대 과천현(果川縣)의 진산(鎭山)이었다.
이 곳 관악산(冠岳山)의 산 중턱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왕후묘(王后墓)라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의 열 번째 임금인 연산군은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즐겨 다녔다.
하루는 임금이 내시 몇 사람을 데리고 사냥을 나섰는데, 막 산 기슭을 올라 냇물을 건너려 할 때였다. 연산군은 어찌된 일인지 내를 건널 생각은 않고 저쪽 편에 있는 빨래터만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기다리다가 지친 내시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전하! 어인 일로 내를 건너지 않으시옵니까?"
"갑자기 사냥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가셨도다."
"일기가 화창하여 사냥하기가 더없이 좋은 날씨인데 어인 일로 사냥을 하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내시는 상감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연산군은 저쪽 빨래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들의 눈에는 저기서 빨래하는 처녀가 어떻게 보이느냐? 미인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박색으로 보이느냐? 어서 말해 보렸다"
"전하, 비록 촌락의 처녀이오나 천하의 절색인 줄 아뢰오" "역시 과인(寡人)의 눈이 틀림 없구나"
연산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돌았다. 한편, 빨래하던 처녀는 웬 사냥군 대여섯 명이 자기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무엇인가 심상치가 않아,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하던 빨래를 주섬주섬 챙겨가지고 급히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침 멀리서 그것을 본 연산군은 "여봐라, 저 처녀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아보고 오렷다. 과인(寡人)이 오늘밤은 호적한 촌락에서 아리따운 처녀와 더불어 회포를 풀어 보아야겠다"하고, 처녀를 유심히 눈 여겨 보는 것이었다.
한편,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딸을 본 처녀의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얘야, 왜 빨래를 하다 말고 이렇게 급히 뛰어오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어머니, 저기 웬 사냥꾼 서너 명이 제 뒤를 따라오고 있어요. 저것 보세요"
이 때 요란히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처녀의 집 앞에서 멈추며 사냥꾼 차림의 장정 서너 명이 처녀의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부인, 당신이 저 처녀의 모친 되시오?" "예 그러하옵니다만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나는 상감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오"
이 말에 여인은 깜짝 놀라며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감돌았다.
"예? 상감마마의 … "
"오늘 상감이 이 곳으로 사냥을 오셨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여기서 유숙하고 가실 것이니 방 하나 깨끗히 마련하도록 하오"
"상감께서 이렇게 누추한 저의 집에 머무르시다니 …" "아무튼 상감의 영(令)이니 그대로 하도록 하시오" 너무나도 갑작스런 일에 여인은 놀랄 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아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처녀가 오늘밤 상감을 모실 것이니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을 하여 상감의 침소에 들여 보내도록 하시오"
"제 딸을요? 어린 것이 어떻게 상감을 모시오리까? 더구나 산중에서 철없이 자란 것이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옵니다. 어린 게 실수라도 하면 … "
처녀의 어머니는 사나이들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사정했다.
그러나 사나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명이오, 어서 빨리 준비되도록 서둘러야 하오" 정말로 하늘이 알면 노할 일이었다. 두 모녀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흐느끼며 "어머니, 만약 이 사실을 만우가 알면 날 죽이고 자기도 죽을 거예요" 이 처녀는 아랫 마을의 만우라는 사나이와 정혼을 했던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단장한 처녀는 연산군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누워서 처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연산군은,
"이런 산골에 너 같은 천하 제일의 여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도다. 어서 이리로 가까이 오너라"
하며, 처녀의 손을 잡아 끌려고 할 때 처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울긴 왜 우느냐?"
연산군은 호통을 쳤다. 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던 처녀는 이 말에 살며시 머리를 들며 상감께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소녀는 이미 백년가약을 약속한 자가 있는 몸이옵니다." "약혼자가 아니라 지아비가 있다 해도 괜찮다. 나는 만인의 어버이요, 만인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거역할 수 없도다. 그러니 어서 자리에 들라. 어서"
한편, 처녀의 약혼자 만우는 뒤늦게야 이 소식을 듣고 미친듯이 달려와서 처녀의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문앞에 지켜선 병정들이 떠밀며 막아서는 바람에 도저히 처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처녀와 연산군이 단꿈에 취해 있는 방을 보기 위해서 그 방이 보이는 바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지만, 남의 아녀자를 빼앗다니 에잇, 정말로 더러운 놈의 세상이다. 국왕이면 남의 계집도 마음대로 한단 말이냐"
정말로 원통한 일이었다. 만우는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당장에 임금에게로 달려들고픈 심정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슬픈 상처를 안은 채 처녀와 만우는 혼인을 하였다. 연산군은 그 뒤로도 이따금씩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나왔다가는 처녀를 만나고서 환궁을 하곤 하였다.
이러한 일로 처녀는 남편을 마주 대할 때마다 가슴깊이 자책감을 느꼈다.
'나는 무슨 낯으로 오늘밤도 서방님을 대하나?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자.' 그리고는 뒷산 오동나무에 목을 매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바위 밑에 묻고는 가슴 아픈 상처를 안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뒤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연산군이 처녀의 집에 들러 그 이야기를 듣고서 "괘씸한 것들, 아니 내가 저희들 꾀에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 그래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는 자기들끼리 멀리 가서 살려고? 고약한 놈들"
그는 화가 치밀어 신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저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확인해 봐라"
그런데 이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임금의 명(命)에 따라 병정들이 막 무덤을 파려 할 때 임금을 부르는 처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 "
"아니 처녀의 목소리가 … "
연산군은 깜짝 놀랐다. "상감마마, 이부종사를 한 죄많은 소녀, 죽음으로서 지아비에게 사죄함을 얻으려고 이렇게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마마는 어찌하여 소녀를 괴롭게 하시옵니까? 원하옵건대 차후로는 소녀를 괴롭히지 마시옵소서"
처녀의 목소리는 슬프게 멀리멀리 퍼지더니 차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놀란 연산군은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쳤다.
"너희들은 그 처녀의 혼을 못 보았느냐?"
못 보았사옵니다. 상감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여봐라! 그 무덤을 다시 전과 같이 덮고 곱게 다듬어서 비석을 세운 다음 왕후묘(王后墓)라 부르도록 하여라."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후묘(王后墓)는 임자없는 무덤이 되어 버렸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강득룡(康得龍)의 유택
과천시 중앙동(현 정부제2종합청사 뒤)에 자리잡고 있는 안정공(安靖公) 강득룡(康得龍)의 유택은 주산(主山) 관악산(冠岳山) 남쪽 줄기로 뻗어 내려 건해우선용(乾亥右旋龍)으로 임입수(壬入首) 해좌사향(亥座巳向)이다.
물은 정미(丁未)·병오(丙午) 양쪽에서 득수(得水)가 되어 을진파(乙辰破)로 흘러간다. 산세는 관악산 남맥(南脈)인 중심 맥이 여러 번 기복(起伏)하면서 내려 뻗은 용세(龍勢)로 좌우 겹겹이 용호(龍虎)를 이루어 놓았다.
형국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주용(主龍)이 금국(金局)으로 농후(農厚)한 용세(龍勢)를 갖추어 닭의 몸을 이루었고, 전면 조안산(朝案山)은 수 백 봉우리가 팔백형화(八百炯火)와 수 백 분대(粉袋)를 이루어 내조(來朝)하였으니 형국이 매우 광활하다.
삼길육수(三吉六秀)의 묘한 영봉들이 사방으로 격을 이루었고, 넓은 들 복판으로 여러 물이 합금(合襟)이 되어 혈(穴)을 감싸고 흘러간다.
수 백년 후에는 후손들이 더욱 왕성하게 번창할 자리이며, 부귀(富貴)를 아울러 갖춘 큰 명당자리이다.
모든 강(康)씨는 동조(同祖)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강(康)씨의 득성조(得姓祖)는 기자조선(箕子朝鮮) 때에 기자(箕子)의 막료였다는 강숙(康叔)이고, 시조는 고대 전설상의 인물인 호경(虎景)이다.
그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외육대조(外六代祖)로 전하여 진다.
『고려사(高麗史)』·『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 의하면, 그는 신라 말엽의 사람으로서 스스로 성골(聖骨)장군이라 일컬으며, 백두산으로부터 각처를 유랑하다가 송도(松都)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뒤에 강충(康忠)이란 아들을 낳고, 충(忠)은 아들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보육(寶育)이 곧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외고조부(外高祖父:일설 외증조부)로서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뒤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追尊)된 분이시다.
그러나 강(康)씨의 실질적인 중시조(中始祖)라 할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은 고려 고종조(高宗朝) 몽고 침입 때의 호종공신으로서 충렬왕(忠烈王) 때에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신성(信城)은 신천(信川)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이 때부터 신천(信川)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오늘날의 모든 강(康)씨는 곧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으로서 곡산(谷山) 강(康)씨의 중조(中祖) 강서(康庶:象山伯)는 육세(六世), 재령강씨(載寧康氏)의 중조(中祖)인 강득룡(康得龍)은 이태조(李太祖)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친오라버니다. 그는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으나 조선(朝鮮)이 건국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품고 관악에 은거, 연주암(戀主庵)에 살면서 매일같이 연주대(戀主臺)에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태조(李太祖)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안릉(安陵)은 재령(載寧)의 옛 이름)에 봉하였고,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그의 후손은 재령(載寧)에 관적하였다.
그 밖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으며, 현근대(現近代)에도 관리 · 교육가 · 산업가들이 왕성히 번창하고 있다.
이는 관악산 밑에 자리잡은 안정공(安靖公) 강득룡(康得龍)의 충절에 기인하는 바 크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교화당 이야기
현재의 안양동은 옛 과천현 하서면 안양리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안양 5동 현 안양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옛 마을의 이름이 교화동(敎化洞)이었던 바, 여기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고 있다.
오늘의 엄청난 변화와는 달리 이 마을은 원래는 수리산을 뒤로 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이 동네에 가난한 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외아들마저 글공부를 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무엇보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하였다. 비록 끼니는 거를 지라도 틈만 나면 서당을 기웃거리며 어깨너머로 문자를 익히느라고 귀가시간이 늦곤 하였다. 사정을 알 바 없는 부모는 가난한 집 자식이 그나마 게으름을 피운다고 꾸짖기를 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아들의 학구열에 감복한 서당선생이 그를 불러들여 글을 가르쳤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필경 과거시험에 당당히 급제하였다. 글방과 동네가 한덩어리가 되어 잔치를 벌이며 이를 함께 기뻐하였음은 물론이겠다.
남달리 어렵게 공부한 그는 감격을 안은 채 임금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마을로 내려가 향교를 짓고 무지한 백성들을 두루 가르치고 싶노라고 아뢰었다. 그 뜻을 가상히 여기신 임금은 그의 향리에 커다란 집을 지어 교화당(敎化堂)이라 이름짓고 그 뜻을 펴게 하니 이런 연고로 동네이름마저 교화동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옛날 교화당이 있던 자리에 바로 지금 안양국교가 섰으니 같은 배움의 자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우연이랄 수가 없다고 믿어진다. 가난 속에서 서럽게 공부한 그의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나 할것이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안양리 찬우물
안양시에 편입되기 전 안양읍 안양리는 조선 말기까지도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현 안양5동)였는데, 여기에도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에 있는 찬우물 못지않게 물맛이나 전설로 유명한 또 하나의 찬우물이 있다.
이 찬우물은 수리산 줄기에 위치한 많은 우물 중에도 그 수질이 매우 좋으며, 수량이 끊이지 않고 일정한 것이 천혜의 특징이다. 수리산 지형은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세로 찬우물은 그 가슴 부분에 해당된다고 하니 그 샘물이 마르지 않음은 호랑이의 젖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에 몹시 가난한 부부가 살았는데, 생업이라고는 산등성이의 몇 뙈기 밭과 다랑논 몇 두락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인 연고인지 여러 해째 가뭄이 들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는 이 부부는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끼니는 고사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기조차 힘겹게 된 상황이었다.
생각다 못한 이 부부는 마지막 남은 곡식을 털어 음식을 마련하고 수리산정에 올라 며칠 밤낮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다 잠시 깜박 졸았던가 싶었는데, 꿈속에 수리산 산신령이 나타나 하는 말이,
"그대들의 정성이 갸륵하여 물을 주겠노라. 지금 당장 내려가서 그대의 논밭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우물을 파도록 하여라."
이 말을 들은 부부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분부대로 하였다. 과연 그 가뭄 속에서도 엄청난 양의 물이 펑펑 솟아나지 않는가. 부부는 다시 무릎을 꿇고 신령님께 감사를 드린 다음 정성을 다하여 이 우물을 관리하였다. 그 후로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되어 오래지 않아 근동에 이름난 알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여름에도 우물 주변에 얼음이 얼 정도로 몹시 차고 마르는 법이 없어 지금도 안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우물이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연주암의 눈물
관악의 상봉(上峯) 연주봉(戀主峰)을 배후에 지고 유수첩첩(幽遂疊疊)의 심곡(深谷)을 내려다 보는 위치를 점했을 뿐만 아니라 사정(寺庭)에서 조망(眺望)되는 빼어난 봉우리마다 기암(奇岩)이요, 괴석(怪石)으로 이루어져서 아연 금강산 중에 든 감을 자아내게 하는 연주암(戀主庵)은 사사(寺史)로나 웅대함으로나 삼막(三幕)과 비기는 거찰(巨刹)이다.
연주암(戀主庵)의 역사는 1,320여년 전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17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으며, 창사(創寺) 당시의 사명(寺名)은 관악사(冠岳寺)인데, 위치는 현재의 자리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570여 년 전 조선 제3대 태종(太宗) 11년에 태조의 제일·제이 왕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녕대군(孝寧大君)이 현재의 자리로 이사(移寺)시킨 것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특히 관악사(冠岳寺)로 이사(移寺)를 하도록 뜻한 데에는 남모르는 슬픔이 있었다.
태조(太祖)가 제일,제이의 왕자를 비켜놓고 제삼자(第三者)인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채고, 양 대군은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머금으며 왕궁(王宮)을 벗어나 발길 닿는 대로 방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상심한 두 왕자는 민가에서 우로(雨露)를 피하거나, 혹은 산정에서 날을 밝히며 형은 아우를 아우는 형을 서로 위해 가며 산에서 산으로 헤매기를 여러 달이 지나 문득 발을 멈춘 곳이 관악산정(冠岳山頂)이었다. 그런데 두 왕자는 보지 않고 생각지 않으려면 왕궁(王宮)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산정(山頂)보다는 왕궁이 보이지 않는 관악사(冠岳寺)에 들어가 수도(修道)를 함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잊으려고 할수록 나타나는 왕좌(王座)에의 애련한 추억과 동경의 정을 누를 길이 없어 동봉(憧峯)으로 절을 옮기려고 지금의 자리로 이사(移寺)를 시켰다. 그렇지만 두 왕자의 발길은 언제나 산정(山頂)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세인(世人)이 이 두 왕자의 심경(心境)을 아로새겨 관악산정(冠岳山頂)을 연주대(戀主臺)라 불렀으며, 사명(寺名)도 모르는 사이에 연주암(戀主庵)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제일 왕자 양녕대군은 왕위를 단념했지만, 효령대군은 끝내 왕위에 대한 정을 못 잊어 관악산(冠岳山)을 떠나기까지 했으나 끝내 왕좌에 앉아보지 못한 채 원한이 서린 관악산록(冠岳山麓)에 묻히고 말았다.
사사(寺史)에는 여말(麗末)의 두문동(杜門洞) 72인(人)으로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강득용(康得龍) 등이 이성계의 모반에 반감을 품고 관악(冠岳)에 들어갔다 하나 서견(徐甄)만이 있고 나머지는 실기(實記)에 없으니 오전(誤傳)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 주봉(主峯)에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불평객들이 주(主)를 그리워 했다고 하여 연주봉이라고도 전해져 온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망경대(望京臺)의 한
막계동(幕溪洞) 과천 서울대공원 뒤에 있는 산이 청계산(淸溪山)이다. 청계산의 옛 이름은 청룡산(靑龍山)으로 이 산정에서 청룡(靑龍)이 승천했다고 전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산중에 고찰(古刹)이 있으니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고려 말기의 중신(重臣)으로서 박학(博學)하기로 그 이름이 높았던 이색(李穡)이 일찍이 이 곳을 찾아 읊은 시와 조선 초기의 문장가로 유명한 변계량(卞季良)의 시가 있다.
이 산정에 석대(石臺)가 하나 있으니, 이 석대가 바로 망경대(望京臺)다.
망경은 원래 만경(萬景)이라 하여 이 곳에 오르면 눈 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고려말을 지나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 갈기갈기 찢어진 의복에 그야말로 대지팡이와 짚신 차림의 초라한 선비 하나가 이 만경대에 오른 후로는 만경이 망경(望京)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으니, 이 행색이 초라한 선비가 바로 고려 중신(重臣)의 한 사람인 조윤(趙胤)이었다.
조윤(趙胤)은 이집(李集) · 원천석(元天錫) · 길재(吉再) 등과 함께 고려를 빛내던 명유(名儒)로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趙浚)의 친 동생이기도 하다.
고려의 신하이던 이성계가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고, 조선왕조를 창업하자 지금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 하던 명신(名臣)들은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라는 유교사상에 젖어, 이색을 위시해서 조윤 · 길재등이 이성계에게 등을 돌리고 청계산을 찾은 것이다.
이성계에게는 정도전 · 조준 · 배극렴 등이 따랐을 뿐 명신(名臣)들은 두문동(杜門洞)으로 삿갓을 쓰고 사라지고, 국민들은 정권의 교체에 본안하여 철시(撤市)를 하고, 송도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 정도전(鄭道傳)이 궁여지책으로써 과거를 통해 인재를 구하기로 하고 널리 과거 통문(通文)을 냈으나 문과 · 무과에 응시한 것은 시골뜨기 밖에 없었다.
이 때 이색이 초청을 받았다. 이색이 궁에 들자 이성계는 친히 나아가 맞아들였으나 왕좌에 오른 것을 본 이색은 구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찾음이요, 형에게 신도(臣道)를 다 하러 찾았음은 결코 아니외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물러났고, 길재는 신 왕조에서 내린 박사(博士)의 칭호도 물리치고 입궐도 않은 채 양모차(養母次) 입산한다는 편지만 전하고 사라졌다. 김자수(金自粹) 또한 5 · 6차의 초청에 못 이겨 사당(祠堂)에서 최후를 고하고 음독자살로써 이성계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마지막으로 부른것이 바로 조윤이었으나, 조윤은 자기의 이름이 조선 공신록에 오른 것을 보고 실소를 하며 이는 형(조준)이 아우를 아낌이 아니라 아우를 욕함이 크외다하고 이태조에 붙은 형을 조롱하고서 이성계가 준 호조판서의 벼슬을 반환하였다. 그리고는 이름 윤(胤)을 견으로 고치고 자(字)를 종견(從犬)이라 했으니,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니 개와 같다 함이었다.
아우 조종견(趙從犬)은 물러가오. 형은 역신의 영화를 길이길이 누리시오. 형과 조선을 버린 조윤은 양주 · 광주의 깊은 산을 헤매며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높은 봉우리에 오르니 이 곳이 바로 청계산정이었다.
산정에서 굽어보니 때는 단풍이 한창 드는 가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나라와 임금을 잃고 헤매는 조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지는 못했으니 멀리 송경(松京)에 사무친 정은 통곡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만 나라를 잃고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내 어찌 죽지 못하노 이렇게 송도를 바라보며 울다가 쓰러져 자고 하기를 수삭(類朔),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 조윤의 슬픔에 동정하여 만경대(萬景臺)를 망경대(望京臺)라 불렀다고 한다.
조윤이 청계산에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성계는 그 충절에 깊이 감동하고, 그 충절을 이(李) 왕조로 돌려보기 위해 친히 청계산으로 조윤을 찾아 돌아오기를 수 차 권했으나 조윤은 멀리 송도를 바라볼 뿐 말 한마디가 없었다.
이에 조윤의 마음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달은 이성계는 우리 왕조에는 역신이나, 그 뜻은 장한지고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쓸쓸히 돌아갔다. 그래도 조윤을 못잊어 산정에 초막을 지어 비와 이슬을 피하게 하였으나, 조윤은 이 또한 보기 싫다 하여 청계산을 떠나 양주(楊州)의 깊은 산으로 발을 옮기었다.
이 초막이 오늘의 망경대(望京臺)이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매곡동 이야기
옛 과천군 상서면 비산리에 해당하는 곳(현 안양시 비산동)에 매곡동(梅谷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가에서 부리는 말을 사육하던 곳이라 하여 마장골이라고 불렀으나 후대에 오면서 매곡동으로 불리는 한편,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중엽 이 마장골에서 한 아낙네가 갓난아이를 풀밭에 뉘여 둔 채로 김을 매고 있었는데, 돌연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아이를 채어 달아나버렸다. 아이를 잃은 아낙네는 그 날로 몸져 눕고 말았다.
며칠 후 이 마을의 나무꾼이 산에 갔다가 커다란 매 한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 즉, 문제의 그 매가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곧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그가 포졸들을 앞세우고 마을 사람과 함께 현장을 다시 찾아갔을 때는 매도 아이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어디에선가 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후로 마을이름도 매곡동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남태령 고개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나루에 이르고, 다시 흑석동(黑石洞)을 지나 강변을 끼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동작동(銅雀洞) 이수교(梨水橋)를 우편으로 돌아가면, 승방평(僧房坪) 석굴암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6㎞ 쯤 가면 큰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바로 남태령(南泰嶺)이다. 이 고개는 예전에 과천(果川)을 거쳐 수원(水原)으로 가던 옛길이었다. 또한 삼남(三南)으로 통하던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여 묘소로 가시던 길이었다.
과천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물맛이 좋아 정조께서 가자(加資)로 당상(堂上)벼슬을 제수(除授)했다는 우물이 있고, 그 위 산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아버님이신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할아버지에 의해 돌아가실 때 협력했다는 김상로(金尙魯, 1702-1766)의 형인 좌의정(左議政) 김약로(金若魯, 1694-1753)의 묘소이다.
곡담을 쌓아 정승묘답게 모두 갖추어진 묘였지만, 정조께선 지난날의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지나는 길 옆에 놓인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뒤 안양에 만안교(萬安橋)를 새로 놓고, 새 노정(路程)을 택하여 다니게 된 것이 이러한 연유에서였다고 한다.
정조(正祖)께서 과천에서 쉬어 가실 때, 과천의 옛 고을 이름을 따서 이 곳 아헌(衙軒)인 동헌에 부림헌(富林軒), 내사(內舍)를 고요하고 편안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라 명명(命名)하고 친히 현판을 썼으니(정조 14년(1790) 2월 11일), 지금까지도 그 현판이 남아 있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남태령(南泰嶺)에 얽힌 사연이 있다.
남태령에 수목이 울창하고 후미진 곳이 많아 관악산을 넘나드는 여우가 많이 출몰하였다 하여, 여우고개〔狐峴〕라 불러 오고 있었다.
하루는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에 모신 사도세자의 능원에 행차하실 때 남태령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멈추시고 잠시 쉬어가게 되자 한 촌로(村老)에게 넌지시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옵나이다."
하고 즉석에서 고개의 이름을 고치어 아뢰었던 것이다.
정조께서는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임을 이미 듣기도 했으려니와, 한편으로는 일찍이 고려조의 공신(功臣)이요, 명장(名將)으로 알려져 있는 강감찬(姜邯贊)이 이 고개를 지나가다가 여우들의 장난이 너무 심하여 크게 꾸짖어 호령하기를,
네 여우들이 다시 이 고개에 근접을 하는 날이면, 너의 족속은 모두 멸종할 줄 알아라. 하고 한 소리가 있은 후로 다시는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을 들었기도 하였는지라, 효심도 극진하지만 인자(仁慈)하기로 유명한 정조께서도 그 괘씸함을 참지 못하시고,
"너 어찌 거짓 이름을 대었느냐? 그 죄 죽어도 마땅할 지니라."
하며 크게 꾸짖으시었다.
촌로는 엎드려 죄를 기다리는데, 정조께선 촌로에게 거짓 이름을 댄 사유를 또 다시 묻자, 촌로는 "죽을 때가 되느라고 그랬사옵니다. 상감마마께 감히 거짓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여우고개이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쌍스러운 이름을 입바르게 알려올림이 황송하옵기로, 생각나는 대로 알렸사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남태령이라 했는고? 하고 정조께서 물으니
"다름이 아니오라. 이 고개가 서울서 남쪽으로 오면서 맨 처음 있는 큰 고개이옵기로 그리 아뢰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정조께선 촌로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는 잠시 가졌던 노여움을 풀고, 촌로를 오히려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란 벼슬을 내리셨는데, 그후로는 이 고개를 남태령(南泰嶺)이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 촌로는 과천에 살던 변씨(邊氏)라 전해지며, 변씨(邊氏) 일족이 아직도 남태령 부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새술막마을
예로부터 삼남지방(三南地方: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한양을 가자면 지금의 수원을 지나 과천을 거쳐야만 되기 때문에 이 길이 유일한 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올라오는 선비들 역시 청운의 꿈을 안고 이 길을 통하여 한양에 이르렀으며, 실패의 쓰라린 아픔을 안고 낙향하는 사람도 이 곳 과천을 경유하여야 되었기에 과천은 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 관아(官衙)가 있었던 관문리(官門里)를 내점(內店)이라 하고 새술막 쪽을 외점(外店)이라 하였다.
외점(外店) 새술막은 내점을 오기 전에 들러 술과 음식을 찾는 이들이 많음으로 이들을 상대로 하여 도로변에 술집이 많아지면서부터 이 곳을 새술막이라 부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벽상갈화
옛 과천현 막계리(현 막계동)에는 『삼강록(三綱錄)』에 기록된, 효자 최사립(崔斯立)의 무덤과 함께 벽상갈화(壁上葛花)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최결(崔潔)의 아들로서, 지행(志行)이 뛰어나고 경학(經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준거하였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그로 인하여 병을 얻었다. 때는 엄동설한이었는데, 환자가 갈화탕을 몹시 찾았다. 최사립은 벽 앞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러자 돌연 벽상에 갈화가 만발하는게 아닌가. 그는 그 꽃을 따서 정성을 다해 갈화탕을 만들어 아버지께 봉진하였다. 이에 부친의 병환이 쾌유하였으니, 진실로 효성의 지극함에 천지신명이 감동한 까닭일 것이다.
이 사실이 관에 알려지자 과천현감이 사연을 나라에 보고한 즉, 임금께서 그 효심을 크게 상찬하여 중종 9년에 특별히 참의(參議)벼슬에 추증하고, 또 선조 때는 효정(孝旌)을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천 일대의 엄청난 변화 속에서 최사립의 무덤마저 지난 1979년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여 지금은 벽상갈화의 전설만 효행의 예화로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망해암 스님
망해암(望海庵)은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현 안양시 안양2동)에 속한다. 안양 시가지는 물론 멀리 서해를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사찰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임금 때 삼남지방에서 조세로 받은 양곡을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한양을 향해 팔미도(八尾島) 근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거칠어졌다. 놀란 뱃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돌연 뱃머리에 스님 한 분이 나타나 말하였다.
"그대들은 너무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을 들으시오." 그리고는 뱃사람들을 진정시켜 지혜롭게 위기를 넘겼다. 안도의 순간을 맞자 누군가가 물어보았다.
"대사님은 어느 절에 계십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대답하였다.
"관악산 망해암에 있소이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배들이 한강에 무사히 닿은 뒤 뱃사람 중 몇이 곧 바로 망해암을 찾아갔다. 그러나 생명의 은인인 그 스님은 없고 대신 법당 안에 그 스님의 용모를 꼭 빼어 닮은 부처가 하나 모셔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부처님의 큰 자비로 살아났음을 깨달은 그들은 이런 사실을 임금께 아뢰었다. 세종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매년 한 섬의 공양미를 이 망해암 불전에 올리도록 분부하였는데, 이 공양미는 그 후 4백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사육신묘와 매월당
한강 기슭에 있는 사육신 묘소는, 지금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동작구 노량진)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하북면에 속한 곳이었다.
이 곳에는 조선조 7대 세조(世祖) 2년(1456)에, 상왕인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참혹한 국문(鞠問)을 받은 끝에 처형당한 여섯 충신-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응부(兪應浮),유성원(柳誠源)의 시신을 거두어 모신 자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희대의 기인(奇人)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金時習)이 등장한다.
매월당은 조선조 6대 단종 때의 학자요, 충신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태어난 지 칠일 만에 글뜻을 알아 일찍이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다섯 살 때 임금 세종이 불러 삼각산이란 제목을 주며 글을 짓게 했더니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삼각산 높은 봉이 하늘을 뚫었고야
三角高峯貫太淸(삼각고봉관태청)
올라가 북두성을 따 보리라
登臨可摘北斗星(등림가적북두성)
꾀뿌리에 일어남이 구름과 안개 뿐이랴
非徒嶽出興雲霧(비도악출흥운무)
능히 왕도를 만세토록 편안케 하리
能使王都萬歲寧(능사왕도만세령)
세종이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상으로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며 또 한번 그의 슬기를 시험해 볼 양으로,
"네가 능히 가져갈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린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비단을 풀어 끝과 끝을 이어매어 허리에 걸치고는 어렵지 않게 끌고 갔다. 세종이 다시금 경탄하였음은 물론이고, 이로 하여 그의 명성이 일국을 뒤흔들었다.
그가 삼각사나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공부를 하던 중 단종의 퇴위 소식을 들은 것이 스물한 살 때였다. 그는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나서 사흘을 통곡하다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또한 소문을 들으니 새남터 형장(지금의 용산역과 한강철교 사이에 위치)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고 처형된 사육신의 시신이 갈가리 찢긴 채로 버려진 채 아무도 수습하려 감히 나서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비탄에 잠겨 있던 매월당은 이 소식을 듣고는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수습하러 나섰다. 밤중에 중 몇 사람과 함께 형장을 찾아 만고 충절의 여섯 충신의 시신을 정성껏 수습하여 지금의 그 자리에 모셨던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그 후에도 벼슬에는 뜻이 없고 내내 비분강개한 세월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충청도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지 삼년 만에 관을 열어본 즉 그의 얼굴이 생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빼어난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세월을 잘못 만난 매월당의 쓸쓸한 생애를 후세 사람들은 길이 애석해 하면서 노량진 기슭의 사육신묘를 지켜보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는 문장과 필법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天文) 지리(地理)와 의약(醫藥) 음양술수(陰陽術手)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였거니와,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한국문학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전설(韓國의 傳說)』, 한국문화도서)

담당자 : 문화체육과 김영창 (02-3677-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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